벤저민 브리튼이 지휘하는 모차르트, 브리튼과 멘델스존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 1964-1970.
출연진
영국 챔버 오케스트라
피터 피어스 — 테너
프로그램 노트
이 프로그램에 담긴 두 콘서트는 5년 남짓한 시간차를 두고 서로 매우 다른 두 명의 벤저민 브리튼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1964년 12월 크로이던에서 열린 공연으로, 브리튼이 원숙한 기량의 정점에 있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쉰한 살로, 마르고 건강하며 활력이 넘치고 눈빛은 날카롭다. 머리는 검고 짧게 깎았다. 그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훌륭히 제 몫을 했던 아버지의 연미복을 새것으로 바꾸고, 에나멜 구두를 곁들였다.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작품 전쟁 레퀴엠의 작곡가이며, 곧 메리트 훈장을 받게 될 인물이다. 콘서트 몇 주 뒤, 그는 그다지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 안식년의 일환으로 인도를 여행할 예정이다.
두 번째 브리튼은 전년도에 발생한 참혹한 화재 이후 1970년 6월 스네이프 몰팅스 콘서트홀의 재개관 갈라 무대에 선다. 그의 머리는 희어졌고, 얼굴은 부어 있으며, 풍모는 노인의 그것이다. 그는 마치 서훈식에 참석하듯 차려입었는데(실제로 관객석에는 여왕이 자리하고 있으니 적절한 복장이다),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3번 가운데 두 개의 중심 악장을 연주한 그의 지휘는 불꽃 같은 열정과 절제의 모범이었지만, 콘서트의 마지막에는 자신의 오페라 《글로리아나》의 장면들을 지휘하며 악보에 머리를 파묻은 채 이마에서 땀을 쏟아내고, 그 땀이 두꺼운 안경을 흐리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1970년의 그는 매우 아팠지만, 아직 이를 알지 못했다. 2년 전 그는 심내막염 진단을 받고 페니실린으로 강도 높은 치료를 받았다. 겉보기에는 회복한 듯했지만 감염으로 심장이 약해졌고, 1972년 8월 대동맥판막 폐쇄부전 진단을 받으면서 심장 이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와 가까운 이들은 그의 신체적 쇠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두 공연을 나란히 놓고 보아야만 그것이 그토록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의 병세는 불가피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의 그의 연주를 듣고 그가 작곡하던 작품들을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브리튼의 음악 활동은 수술대 위에서 겪은 뇌졸중으로 고된 작곡 이외의 거의 모든 일을 그만두게 된 1973년까지 실질적으로 쇠퇴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 이전의 그는 다소 어색한 지휘자였다. 프랭크 브리지 주변 인물 가운데 한 명이자 1930년대 브리튼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마조리 패스는 1938년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가 영원히 계속한다 해도 지휘자가 되지는 못할 거예요 – 그렇게 뻣뻣하고 억눌린 모습은 본 적이 없어요.' 시간이 흐르며 그의 신체적 움직임은 더 유연해졌지만, 브리튼의 지휘에서 중요한 것은 지휘하는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그 일에 가져온 순수한 음악성이었고, 허세 가득한 기사 작위 지휘자들의 빈약한 음악적 양식에 길들여진 영국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이를 크게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는 레너드 번스타인식 지휘대 위의 과장된 몸짓 – 커다란 도약, 치켜뜬 눈썹, 능글맞은 미소 – 에 빠지지도 않았다. 브리튼은 미국 동시대인인 그를 조심스럽게 존경했지만, 두 사람은 기질이 겹치는 부분이 너무 적어 친구는커녕 경쟁자가 될 수도 없었다. 브리튼은 연주자들에게 정중하면서도 직설적으로 대했고, 로스토프트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흔적은 오래전에 사라진 억양으로 지시를 내렸으며, 더없이 우아하게 프레이징을 이끌었다. 그의 신체성은 피아노 앞에서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가끔 그를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훌륭히 이해하는 같은 연주자들과 거듭 작업함으로써 신체적 어색함을 보완했다.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그가 특히 아끼는 단체였다.
1964년 브리튼이 지휘한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0번은 지휘자로서의 그를 이루는 수많은 면모를 집약한다. 이는 계시적인 영상으로, 미소 없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들과 브리튼이 등장한 그 어떤 이전 영상보다도 현대적인 오케스트라 콘서트 촬영 방식을 보여준다. 박자 중간에 지휘봉을 든 손등으로 이마를 닦는 순간을 비롯해 사랑스러운 세부가 담겨 있으며, 꾸밈없는 이 연주에서 전해지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이 작품을 잘 알았던 브리튼의 경탄이다. (그는 1934년 브뤼노 발터의 연주에 관해 '모차르트의 훌륭한 G단조'라 쓰며, '분명 이제껏 구상된 음악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작품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연주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 관객석의 젊은 재킷 차림 남성들이 비틀스풍 머리를 하고 있는 영상 때문만이 아니라, 그 부드러움과 섬세함, 풍부한 현악 비브라토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의 모차르트 지휘자들이 곧 등장할 참이었으며, 이들도 브리튼이 여기서 사용한 소규모 현악 편성(제1바이올린 8명, 제2바이올린 6명, 비올라 4명, 첼로 4명, 더블베이스 2명)을 답습하겠지만, 몰아붙이는 빠르기와 흔히 메마른 음향은 이들을 브리튼과 구분 짓게 될 것이었다.
브리튼은 같은 콘서트에서 자신의 《녹턴》 – 온갖 종류의 밤의 생각과 정서를 불러내는 작품 – 을 지휘할 때도 마찬가지로 절제된 모습을 보인다. 간혹 번뜩이는 눈빛이나 손가락으로 찌르는 듯한 동작이 있지만, 대부분 그는 이 어려운 악보 속에서 무표정하게 연주자들을 이끌고, 연주자들은 필사적으로 박자를 세며 이에 응답한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43번(‘내가 가장 눈을 감을 때, 내 눈은 가장 잘 본다’)에 붙인 위대한 음악을 지휘할 때조차 약간 초연한 채 서서 음악이 스스로 마법을 부리도록 내버려 둔다. 피어스의 목소리는 신선하고 역동적이며, 그는 이 시기 믿을 수 없는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한 소품으로 성악 악보를 들고 있지만 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 연주는 《녹턴》에 대한 브리튼과 피어스의 여유롭고 다채로운 스튜디오 녹음과 더불어, 음악가들이 공개석상에서 어떻게 함께 작업했는지를 친밀하게 보여준다 – 빈틈없는 앙상블과 뒷받침, 그리고 콘서트가 끝난 뒤 피어스의 손을 잡으며 브리튼이 보내는 감탄의 눈빛까지.
스네이프의 영상 역시 계시적이다. 꿀빛을 띠는 색감은 필름이나 현상소의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조명 아래에서 몰팅스는 바로 이런 모습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공연이 1964년 콘서트보다 훨씬 더 동시대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단지 컬러 필름 때문만이 아니다. 이토록 짧은 기간에도 스타일은 변했고, 연주회 복장을 하지 않은 오케스트라는 1960년대의 가장 큰 성취인 뚜렷한 개성의 감각을 구현한다. 섬세한 프레이징, 절묘한 루바토, 손에 잡힐 듯한 구조감과 추진력 같은 브리튼 특유의 면모가 있으며, 기억되어야 할 것은 쇠퇴기에 접어든 20세기의 완성된 음악가의 외양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질이다.
폴 킬디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