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 하차투랸

소련 음악계의 세 ‘거장’ 중 한 명

구독자 전용

프로그램 노트

피터 로젠 글
프로듀서/감독

2003년 2월 24일

우리의 이야기는 과거 소련에서 펼쳐진다 – 이상주의와 공포, 영웅주의와 부패, 고급 문화와 어리석은 허세가 공존했던 독특한 대조의 땅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어떤 예술이 꽃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예술가, 작가, 작곡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자의적인 본질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히틀러가 나치 대의를 위해 민중을 결집시키는 데 베토벤과 바그너의 음악을 이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스탈린은 국가적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교향곡과 오페라의 창작을 장려했다.

스탈린주의의 암울한 밤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뒤덮은 1930년대부터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사회주의 교리는 소련 생활의 모든 측면을 지배했다. 스탈린은 러시아의 문화와 창작 활동을 철저히 장악했다. 그의 대본 검토와 수정, 출연진과 감독에 대한 승인, 그리고 그의 "최종 편집" 없이는 어떤 영화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의 도장 없이는 어떤 그림도 갤러리 벽에 걸리지 못했다. 그의 찬사를 받았다는 여권이 없이는 어떤 책이나 시도 출판되지 못했다. 음악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당 노선의 이데올로기로 구현되었다. 그것은 ‘영웅적-애국적 고전주의’라는 용어에 들어맞아야 했다. 이에 맞지 않는 이들은 파멸할 운명이었다.

이 영화는 비극적인 시대의 어둠 속에서 작업한 한 작곡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모순으로 가득한 삶이었다. 하차투리안은 스탈린주의를 위해 어릿광대 노릇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악행을 향해 울부짖는 음악을 작곡했던 것일까? 그는 소련이 총애한 음악의 아들이었을까, 아니면 희생양이었을까? 크렘린의 충직한 신민이었을까, 아니면 비밀 반체제 인사였을까?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대부분의 소련 시민들처럼 하차투리안은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이라는 가면 뒤에 복잡한 사생활을 감추고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초기 영광스러운 시절, 하차투리안 같은 젊은 작곡가들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정치적 격변, 즉 옛 식민 제국들의 쇠퇴에서 필수적인 일부를 이루었다. 그리고 1903년 아르메니아계 조지아에서 태어난 그의 코카서스 뿌리는 강렬하게 매혹적인 약속을 제시했다.

그러나 음악에서 그러한 낭만적 이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염되었다. 현대 음악, 또는 국가적 리듬과 선율의 규범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음악은 "형식주의적" 혹은 추상적이며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불렸다. 전쟁 중 스탈린은 자신의 작곡가들에게 더 이른 시대의 차이콥스키 "1812년 서곡"과 같은 "전투 교향곡"을 쓰기를 원했다. 국민의 비극적인 삶, 전쟁에서 희생된 2천만 러시아인의 슬픔과 상실, 혹은 국가 재건이라는 어려운 경제 시기에 평범한 러시아 시민이 겪은 개인적 곤경을 반영하는 음악은 구상되기도 전에 억압되었고, 위대한 지도자이자 스승에게 맞선 이들에게는 공개적 비난, 굴욕, 규탄이 기다렸다. 블랙리스트였다. 그런 대우를 받은 많은 소련 작곡가들은 조용히 음악계에서 사라졌다. "갈등 없는" 교향곡은 작곡가들이 대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비난과 공포의 이 분위기에서 친구는 친구에게 등을 돌렸다. 작곡가 드미트리 카발렙스키는 형식주의적, 반인민적 경향을 지닌 작곡가들의 블랙리스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가브리일 포포프의 이름으로 바꾸려 했다. 그 시도는 성공했다. 당의 "역사적 결의" 최종 문서에는 카발렙스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재능 있는 포포프는 결국 술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런 이야기는 예외라기보다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일부 소련 작곡가들은 탈출할 수 있었다.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가 그랬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 같은 이들은 그 자리에 남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안락한 삶을 누렸다. 시골의 다차, 명성, 호화로운 리셉션, 공개 행사, 보조금을 받은 여행, 그리고 하차투리안의 경우 많은 훈장이 있었다. 그는 1939년 레닌 훈장과 1941년, 1943년, 1946년 스탈린 메달이라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두 최고 훈장을 받았으며, 그 대상에는 그의 교향곡 제2번을 비롯한 여러 작품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전쟁 직후에 작곡된 그의 교향곡 제3번은 군 장성들과 당 동지들로부터 조롱과 경멸을 받았다. 현대적이고 강력한 그 울림에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그들은 알지 못했고,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히틀러 치하 독일의 슈트라우스와 푸르트벵글러가 현실을 외면하고 정치에서 거리를 두었던 것과 달리,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은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프라우다와 당의 동지들(그가 당원임에도 불구하고)에게 끊임없이 비난받았고 공포 속에서 살았다. 하차투리안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그는 당의 일원이었고, 모스크바에 있는 강력한 소련 작곡가 동맹 조직위원회의 부의장이었지만, 더 많은 것이 걸려 있었기에 그의 공포는 훨씬 더 깊었을 것이다. 수백 명의 작곡가들의 운명과 소련 음악의 미래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1948년 2월 10일, 스탈린과 그의 문화계 하수인 안드레이 즈다노프, 그리고 티혼 흐렌니코프(1948년부터 1992년까지 작곡가 동맹의 막강한 서기)는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통해 하차투리안,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를 비롯한 대부분의 소련 작곡가들을 비난했다. 하차투리안은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는 "퇴폐적 형식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가장 가혹한 공개적 질책을 받았다.

하차투리안은 진심이 아닌 강요된 사과를 했다. 그는 순전히 기술적 숙련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최근 나는 내 자신의 아르메니아적 요소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나는 세계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소련이라는 압력솥은 이미 허약했던 하차투리안의 건강을 무너뜨렸고, 더 많은 교향곡이 될 수도 있었던 작품들의 작곡을 단축시켰다. 그리고 스탈린주의가 은둔적인 반항아 쇼스타코비치의 창조적 재능을 자극하고 고무했을지도 모르는 반면, 하차투리안의 경우는 달랐다. 당 관리로서 그는 체제에 의해 배신당하고 철저히 무너졌으며,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작업할 수 없었다. 그는 제3번 이후 더 이상의 교향곡을 쓰지 않았고, 1948년 이후에는 영화 음악 작곡에 정착했다. 생애 마지막 15년 동안 하차투리안은 초기 작품들을 재작업했을 뿐, 사실상 새로운 작품을 전혀 작곡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교향곡 제3번에 담긴 현대적인 음향은 스탈린주의 공포를 암호화해 표현한 것이었을까? 공개석상에서 당 노선의 선언을 즐겨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 작곡한 것일 수 있을까? 이 교향곡은 15대의 트럼펫과 오르간을 위한 파트를 갖춘 전후 소련 승리주의의 극단이었을까, 아니면 함께 억압받던 소련 시민들의 곤경을 끔찍하게 표현한 것이었을까?

이것은 이 영화가 다룰 흥미로운 질문 가운데 하나다. 하차투리안은 1943년 입당했을 때 공산당의 충직한 아들이었다. 그는 수많은 당 행사에 직접 참석했으며, 선전을 정당화하는 모범적 인물이었다.
그의 명성과 당내 지위는 한동안 그를 보호했다.

그러나 하차투리안과 다른 소련 작곡가들이 택한 순응의 길은 오직 그들 각자만이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식탁 위의 빵이었을까, 가족의 안전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공포였을까? 무엇이었든,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하차투리안,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와 다른 소련 작곡가들이 실제로 소련 체제 안에서 기억할 만한 작품들, 심지어 걸작들까지 창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20세기의 격렬한 시대 속에서 음악을 도덕적 목소리로 되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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