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진
클라우디오 아바도 — 지휘자
프로그램 노트
"베토벤과 함께라면, 배움을 멈출 수 없다."..
...본 출신의 거장(1770-1827)의 교향곡을 끊임없이 재해석해온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말한다. 그는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지휘자로 15년간 재직하며 뛰어난 오페라 지휘자로 명성을 얻었지만, 비엔나에서 한스 스와로프스키에게 사사하며 독일 및 비엔나 레퍼토리에도 익숙해졌다. 오스트리아 수도에서 그에게 또 다른 중요한 경험은 합창단에서 노래한 것으로, 이는 당시 위대한 지휘자들인 브루노 발터, 조지 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리허설을 의미했다.
그는 27세 때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3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밀라노 스칼라 극장 지휘자로 데뷔했다. 이후 뉴욕에서 열린 미트로풀로스 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했고, 카라얀의 초청으로 잘츠부르크에서 지휘했으며,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말러의 교향곡 2번으로 지휘 데뷔를 했다. 같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처음으로 녹음했다. 그러나 비엔나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는 기복이 있었던 반면, 1966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는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30년 후인 1989년, 그는 카라얀의 뒤를 이어 이 명망 높은 오케스트라의 수장이 되었고, 2002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베를린 음악가들과 함께 그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두 번째로 녹음(도이치 그라모폰, 2000)했고, 2001년 1월 5일부터 2월 15일까지 로마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이를 연주했다. 이 감동적인 시리즈는 열광적인 관객 앞에서 연주되었으며, 베를린에서 촬영된 교향곡 9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로마에서 촬영되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이 서양 음악사에 남긴 기념비는 1799년부터 1823년까지 25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베토벤이 작곡했다. 이 기념비는 작곡가의 생애 대부분을 아우르며, 그는 31세에 1번 교향곡을, 54세에 9번 교향곡을 썼다. 베토벤을 끝으로 하이든처럼 100곡에 달하는 교향곡을 작곡하던 교향곡 작곡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 이후로 음악가들은 각기 독특한 개성을 담은 약 10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 기념비는 웅장하지만 친숙하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가능한 한 넓은 대중에게 호소하는 서양 음악의 본보기다. 그래서 정치적 목적으로도 널리 사용되었으며(9번 교향곡의 환희의 송가는 공식 유럽 국가), 상업적 목적(광고)뿐만 아니라 영화(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 등)에도 활용되었다.
자유의 상징이자 독립의 행위로서 베토벤의 교향곡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환상적인 믿음의 표현이며, 그에 따라 각자 자신을 그 안에서 발견한다. 아바도는 이러한 곡들을 감정을 만족시키기보다 숭고함을 우선시하는 위엄으로 지휘한다.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부터 얻어내는 놀라운 음향 덕분에 아름다움은 인간의 승리가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 혹은 교향곡 2번
"거칠게 다듬어진 분노한 야수... 헛되이 꼬리로 휘두른다..." 이는 1803년 4월 5일 비엔나에서 초연된 지 1년 후 출판된 D장조 교향곡 2번 Op. 36 악보에 대해 한 평론가가 사용한 표현이다. 1802년에 작곡된 이 작품은 베토벤의 난청이 갑자기 악화된 위기의 해에 쓰였지만, 그의 고통의 흔적은 없다. 오히려 드뷔시가 가장 좋아하는 교향곡으로, 베토벤 리듬의 힘이 넘친다. 영국 음악학자 그로브에 따르면, "구체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절정; 베토벤이 이전에 아무도 꿈꾸지 못한 영역을 탐험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