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네메 예르비는 소련 정권이 금지했던 라틴 미사 텍스트 일부를 설정한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의 Credo를 지휘했다. 예술적 자유를 위한 이 입장으로 촉발된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가족은 1980년에 에스토니아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 파보 예르비는 17세였다.
그는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원과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했고,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연구소에서 레너드 번스타인과 함께 공부했다. 특히 북유럽 레퍼토리를 지휘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및 러시아 음악 등 다른 선호 분야도 확립했다.
파보 예르비는 이후 첫 상임직을 맡았다: 말뫼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1994-97)과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95-98) 및 버밍엄 시티 심포니 오케스트라(1996-99)의 수석 객원 지휘자였다.
2000년대에 들어 그의 경력은 가속화되고 활동은 다양해졌다.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첫 공연 후 즉시 음악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그는 2001년부터 이 뛰어난 기술적 역량으로 유명한 미국 오케스트라와 함께 일해왔다.
2003년, 수년간의 협력 후 프랑크푸르트에 기반을 둔 헤센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그를 음악 감독으로 초청했다. 2004년에는 브레멘 독일 실내 필하모니의 예술 감독이 되었다. 이 독립 실내 오케스트라와 함께 그는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큰 찬사를 받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 사이클을 녹음했다.
파보 예르비는 이미 약 50장의 녹음을 했다. 그 중 특히 스톡홀름에서 녹음한 첫 음반들인 스텐함마르의 제2교향곡과 시벨리우스의 Lemminkäinen Suite와 Kullervo, 에스토니아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에스토니아 국립 남성 합창단, 엘러헤인 소녀 합창단과 함께한 같은 작곡가의 칸타타(에스토니아 최초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소련 시대에서 막 벗어난 나라에 큰 영향을 끼침),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루토슬라프스키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그리고 그와 가까운 두 작곡가인 에르키 스벤 튀르(Erkki Sven Tüür)의 성악 음악과 레포 수메라(Lepo Sumera)의 교향곡에 관한 CD를 특히 좋아한다.
2004년 파보 예르비는 처음으로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닐센(교향곡 2번), 베르크(일곱 개의 초기 노래), 시벨리우스(Pelléas et Mélisande의 부수음악) 작품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들과의 관계는 즉각적이었고 공연은 훌륭했다. 2006년에는 바르톡과 코다이 작품으로 다시 초청받았다. 2007년에는 2010-11 시즌부터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이 되기로 동의했으며,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을 지휘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 이후로 그는 모차르트, 베토벤, 차이콥스키, 프로코피예프, 드뷔시, 비제, 브리튼, 그리고 그의 동료 아르보 페르트의 음악을 포함한 폭넓은 레퍼토리를 파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다뤘다. 2010년 9월에 발매된 비제 작품의 첫 녹음 이후, 2011년 9월에는 마티아스 괴르네, 필립 자루스키, 에릭 피카르, 파리 오케스트라 합창단과 함께한 포레의 레퀴엠 음반이 발매되었다.
2010년 파보 예르비는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10년 임기를 마쳤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음악 감독 명예직에 임명되었으며, 파리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직은 2015-16 시즌까지 연장되었다.
2012년 7월, 파보 예르비가 2015/16 시즌부터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2011년에는 프레데릭 미테랑으로부터 프랑스에서의 음악에 대한 탁월한 공헌을 인정받아 예술문학훈장(Chevalier de L'Ordre des Arts et des Lettres)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