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월, 아이작 스턴은 카네기 홀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졌다. 다음 해에는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두 차례 출연했다. 1945년에는 콜럼비아에서 첫 녹음을 했고, 다음 해에는 할리우드에서 배우 존 가필드의 바이올린 파트를 대역하는 역할을 맡아 영화 Humoresque에 참여했다. 이로써 그의 경력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그는 토머스 비첨 경,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브루노 월터, 유진 오르만디, 레너드 번스타인, 조지 셀 등 최고의 지휘자들과 함께 연주했다. 그는 위대한 임프레사리오 솔 후록의 삶을 다룬 영화 Tonight We Sing에서 외젠 이자이 역을 맡았다. 1948년에는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유럽 데뷔를 했다. 1950년에는 파블로 카잘스와 알렉산더 슈나이더가 조직한 바흐 사망 200주년 기념 프라데스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카잘스와 함께 페르피냥과 프라데스에서, 그리고 몇 년 후에는 푸에르토리코 페스티벌에서 다시 공연했다.
그 유명한 첼리스트와의 만남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인해 그는 유진 이스토민, 알렉산더 슈나이더, 윌리엄 프림로즈, 폴 토르텔리에르와 함께 실내악 활동에 일부를 헌신하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유진 이스토민, 레너드 로즈와 함께 트리오를 조직했으며, 이 트리오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로즈가 1984년에 사망할 때까지 광범위하게 투어를 다녔다. 1956년 냉전 시기에는 미국 음악가 중 최초로 소련 전역을 광범위하게 순회 공연한 인물 중 하나였다. 반면, 예후디 메뉴힌과 달리 그는 나치 통치 하에서 자행된 잔혹 행위를 기억하며 독일에서 연주하는 것을 항상 거부했다. 그는 이스라엘 국가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스라엘-미국 문화 센터 및 재단과 꾸준히 협력하여 그 나라의 젊은 음악가들에게 조언과 지원을 제공했다. 이로써 그는 이츠학 펄만, 핀차스 주커만, 미리암 프리드, 세르지우 루카, 슐로모 민츠 등 젊은 이스라엘 비르투오소들의 교육자이자 멘토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활동 외에도 아이작 스턴은 미국 음악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가 예술 위원회의 음악 감독으로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60년부터는 카네기 홀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그가 포함된 여러 인사들과 함께 이 명망 높은 콘서트홀을 철거 위기에서 구해냈다. 1979년에는 중국을 방문했으며, 이 사건을 다룬 영화 From Mao to Mozart는 1981년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윌리엄 슈만의 1950년 협주곡, 레너드 번스타인의 1954년 세레나데, 조지 로치버그의 1975년 협주곡, 펜데레츠키의 협주곡 1번 (1977), 뒤틸뢰의 1985년 협주곡, 맥스웰 데이비스의 1986년 협주곡 등 많은 현대 작품들이 아이작 스턴을 위해 작곡되었다. 1987년에는 요요 마, 에마누엘 악스와 함께 새로운 트리오를 결성하여 하이메 라레도, 조량 린 등과 함께 공연 및 녹음을 했다. 그의 불같은 성격, 독특한 음색의 관대함, 매혹적인 음악성 덕분에 아이작 스턴은 비르투오소와 음악가 사이의 이상적인 균형을 이루었다. 50년 이상 미국 바이올린 연주의 상징이자 20세기 최고의 거장 중 한 명이다.